정치가 시장을 삼키다, ‘기술 민족주의’의 서막
고래 싸움에 등 터질라…’초격차 기술’만이 살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대표 반도체 기업 인텔을 정조준하며,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또다시 지정학적 격랑에 휩싸였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기업과 행정부의 갈등을 넘어, ‘미국 우선주의’가 반도체 공급망에 어떤 식으로든 관철될 것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탄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전선이 동맹국과 자국 기업 내부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글로벌 반도체 지형 변화를 진단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의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정치가 시장을 지배하는 시대, ‘기술 민족주의’의 서막
트럼프 대통령이 립부 탄 인텔 CEO의 과거 중국 투자 이력을 문제 삼아 “즉각 사임하라”고 요구한 것은, 미국 정부가 ‘반도체 법(CHIPS Act)’에 따라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기업의 리더십과 경영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지난 8월 7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인텔 CEO는 심각한 이해충돌 상태이며 즉각 사임해야 한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쓰며 전 세계 반도체 업계와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논란의 두 축: 투자와 감독 실패
이번 논란의 핵심은 립부 탄 CEO의 과거 행적 두 갈래로 나뉜다.
- 투자자로서의 행적 (월든 인터내셔널): 그가 설립한 VC ‘월든 인터내셔널’은 수십 년간 중국 첨단 반도체 기업 수백 곳에 최소 2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특히 중국 인민해방군(PLA) 연계 기업과 기술 탈취 통로로 의심받는 ‘천인계획’ 관련 스타트업까지 투자 대상에 포함된 점이 문제가 됐다. 미국의 핵심 기술과 자본이 중국의 기술 굴기를 도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 경영자로서의 행적 (케이던스): 그가 CEO로 재직했던 반도체 설계 기업 ‘케이던스’는 미국의 수출 통제 목록에 오른 중국 국방과기대학(NUDT)에 민감한 기술을 불법 수출했다. 이 사건으로 케이던스는 1억 4천만 달러가 넘는 벌금에 합의했고, 립부 탄 CEO는 최고 경영자로서 ‘감독 부실’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이 두 가지 논란은 그가 ‘반도체 법’에 따라 막대한 혈세를 지원받는 기업의 리더로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낳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사임 압박으로 이어졌다.

인텔의 해명과 불확실한 미래
논란이 거세지자 립부 탄 CEO는 8일, “40년 넘게 최고의 법적·윤리적 기준을 준수해왔다”며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부와 협력하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임직원에게 보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과 맞서면서 인텔의 경영 환경은 당분간 상당한 불확실성을 안게 될 전망이다.
‘안보’가 ‘효율’을 압도하는 시대, 3가지 변화의 물결
이번 사태는 글로벌 반도체 패러다임이 ‘효율성’ 중심에서 ‘안보와 신뢰’ 중심으로 완전히 전환됐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CEO의 국적, 배경 등 비즈니스 외적인 ‘정치적 리스크’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 세 가지 큰 변화를 예고한다.
- 1. 공급망의 블록화 (Decoupling): 미국 중심의 ‘기술 동맹’과 중국 중심의 ‘자립형 공급망’으로 세계가 쪼개지는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다. 양쪽에 생산 거점을 둔 기업들의 전략적 딜레마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 2. 정부 개입의 일상화: CEO 임명을 넘어 기업의 M&A, R&D, 공장 부지 선정 등 핵심 경영 활동 전반에 대한 각국 정부의 개입이 노골화될 것이다. 기업의 자율성보다 국가의 전략적 목표가 우선되는 시대다.
- 3. 중국의 ‘반도체 자립’ 가속화: 미국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중국은 반도체 기술 자립에 더욱 사활을 걸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범용 반도체 시장의 공급 과잉을 유발하고, 새로운 기술 경쟁 구도를 형성할 수 있다.
‘고래 싸움 속’ 韓 반도체, 3대 생존 전략
미국과는 동맹, 중국과는 최대 시장으로 얽힌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그야말로 외줄타기 신세다. 과거의 ‘전략적 모호성’만으로는 생존을 담보하기 어렵다. 변화된 환경에 맞춘 능동적 대응이 시급하다.
- 첫째, 공급망 다변화로 ‘위험 분산(De-risking)’하라. 중국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이고 인도, 동남아, 유럽 등 새로운 생산 거점과 시장을 발굴해야 한다. 특정 국가의 정치 리스크에 기업 전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 둘째, ‘초격차 기술’만이 최고의 방패다. HBM 같은 초격차 기술력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상쇄할 가장 강력한 무기다. 미국도, 중국도 우리 없이는 AI 혁명을 이끌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기술 리더십만이 유일한 협상의 지렛대다.
- 셋째, 정부의 정교한 ‘반도체 외교’가 뒷받침돼야 한다. 기업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다. 정부는 미국 행정부·의회와 상시 소통하며 ‘반도체 법’의 가드레일 조항 등 독소조항을 완화하고, 일본·네덜란드 등 핵심 소부장 강국과 기술 동맹을 강화해 우리 중심의 생태계를 더욱 공고히 다져야 한다.
‘반도체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트럼프와 인텔의 갈등은 이 전쟁이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전개될지 보여주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기업과 정부가 한 팀이 되어 기술력, 다변화 전략, 외교력을 바탕으로 이 거대한 파고를 넘어서야 할 때다.